YMCA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청소년을 지도 육성하며 기독교 사회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기독교 단체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YMCA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과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 존중을 실현함으로써 사회를 변혁시켜 보다 좋은 사회를 이룩한다는 것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광주YMCA는 1920년 7월 29일에 창설되었는데 이미 활발한 활동을 해 왔던 학생YMCA와 교회청년들이 모여서 조직하였다. 먼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교육부 간사였던 이승만 박사의 광주 순회강연이 계기가 되어 1911년에 숭일학교 학생YMCA가 시작되었는데, 전도대를 만들어 지방순회를 하였고 1914년 YMCA연합회 설립 시에 총대를 파송하였으며, 1915년에는 광주에서 학생YMCA 하령회를 개최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민족이 고난 속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던 시대였던 1920년에 민족을 사랑하는 교회 청년들이 모여서 YMCA의 이름으로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고장 민족운동의 지도자요 사회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의 영향을 받은 30여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오원 기념각에 모여서 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는데, 김강, 장맹섭, 서창균, 강태성, 서한권, 장남구, 최순호, 김태오, 최영욱, 황상호, 최영균, 김철주 등이 참여하였다. 초대회장에는 숭일학교 교사였던 최병준, 총무에는 이 고장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철이 담당하였다.
그런데 광주YMCA의 조직에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최흥종 목사는 이 고장 3․1운동의 주동자로서 이미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2대 회장(1922)인 황상호 장로는 3․1운동 때 ‘조선독립 광주신문’이라는 지하신문을 황송우라는 가명으로 발간하여 고초를 겪었으며, 초대회장 최병준과 초대 총무인 김철을 비롯하여 많은 회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광주YMCA는 1924년에 최흥종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최영균이 총무가 되었으며, 연합회의 인준을 받아 비로소 그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광주YMCA의 간판을 북문밖 교회의 유치원에 달았다.
초창기의 주요사업으로는 지덕체운동을 목표로 하기 순회 전도대회를 개최하고 광주 유치원을 북문밖교회에 개원하였고 서북여자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숭일학교에서 노동야학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5년 10월에는 광주부근의 촌락에서 농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농촌 8개소에 농민 강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충장로 5가에 최초의 회관인 충장로회관(일명 수기동회관)을 마련하고 체육부활동을 강화하여 이 고장에 유도, 역도, 기계체조 등을 보급시켰다. 이때 최영균 총무와 체육인이며 간사였던 정인세와 김후옥이 헌신적으로 근대체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주YMCA는 1931년에 소년척후대(현 보이스카우트)를 조직하여 소년사업을 강화하였고, 1933년에는 백운동 어비슨 선교사의 집에 광주Y 농업실습학교를 세워서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한편, 충장로회관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광주YMCA도 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탄압으로 수난기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행에 이 나라의 기독교가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게 되고, 1938년 10월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의 조선연합회로 예속되었다. 광주YMCA는 모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김철주 총무가 김동일에게 회관을 빌려주어 목공소로 바뀌었으나 해방 후 오랫동안 되찾지를 못했다. 광주YMCA는 30년대 말엽부터 활동을 중단하다가 1944년 12월 자진 폐회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주YMCA는 그 해 9월 재건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다시 문을 열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청소년운동을 재개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건전한 사회운동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후에 회장은 최흥종 목사가 다시 추대되었고 부회장에 백영흠 목사, 총무는 정인세가 맡았다. 광주YMCA는 충장로회관의 회수가 어렵게 되어 양림동회관을 마련하고 청소년의 지덕체 운동은 물론 농촌사업을 재개하고, 보이스카우트 운동도 1953년에 YMCA에서 분리되어 다시 시작했다.
한편, 광주YMCA는 도심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1949년에 황금동회관을 마련하고 대학Y와 Hi-Y를 조직하여 학생부 활동을 강화하였고,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삼애학원을 설립하였으며 기관지로 ‘빛의 아들’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55년부터는 금남로 2가 회관으로 이주하여 YMCA활동을 하였고, 1959년에는 광주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이 설립되어 모든 재산관리를 하게 되었는데, 초대 이사장에 백영흠 목사가 취임하였다.
광주YMCA는 1964년 11월에 현 금남로 1가 회관을 완공 이전하였고 3층 건물에 체육관을 갖추어서 청소년 교육과 시민문화운동의 중심으로 활용되었다. 그 뒤 광주Y는 인권이 억압받고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70년대에 사회개발 사업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추진하였는데, 시민논단을 비롯하여 신학강좌, 십대의 광장, 대학생 대화의 광장, 신용협동조합 운동, 체육활동을 전개하였다.
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Y중등교사협의회를 통하여 교육 민주화를 선언하는 등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시민학당을 개설하여 시민들을 위한 사회교육 강좌를 전개하였으며, 1986년부터 시민중계실이 출범하여 소비자 보호와 고충처리 등 시민의 권익 옹호에 이바지하였고 청소년 상담사업과 어린이스포츠단이 정착되어 청소년의 사회교육에 전력하였다. 국제와이즈멘 클럽이 활성화되고 청년Y 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최흥종 목사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기 위한 ‘오방장학회’가 조직되었고 국제교류도 활발해져서 1978년부터 일본 요코하마Y와 어린이 축구팀의 교환방문 및 간사 교류가 이루어졌고, 1989년부터는 중국 상하이Y와 교류를 시작하여 3도시 YMCA가 자매 결연을 맺고 정기적으로 협의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7년에 필리핀의 마닐라YMCA와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고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90년대 이후 광주YMCA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조직 및 시설의 확장으로 큰 발전과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위탁사업도 활발해져서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과 청소년 상담실이 내실 있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서구문화센터와 광산구 청소년수련관을 위탁 경영하여 건전한 시민문화 확장과 청소년의 사회교육에 공헌하고 있다. 1998년에는 금남로회관을 증․개축하였고, 지회 설립도 강화되었다. 1994년에 처음으로 설립한 하남지회는 2000년 광산지회와 하남센터로 분립하였고 1998년 설립한 상록센터는 2000년에 서구지회로 발전하였으며, 향토문화마을과 화정복지센터도 수탁 운영하였다. 서구에는 자원봉사센터를 개설하였고, 지회마다 어린이스포츠단 또는 어린이집을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열린보육지원센터와 남자청소년쉼터를 새롭게 개설하였고 2007년 강진 다산수련원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고 2008년에는 나주 청소년 수련관과 학생운동기념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하남센터를 하남지회로 확장,운영하고 있다.
현재 광주YMCA는 5천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50여명의 이사, 위원들이 유지지도력으로 활동하고 간사를 비롯하여 130여명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지난 90년의 광주YMCA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운동과 농촌운동, 소년사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해방 이후에는 청소년을 위한 사회교육과 지역사회를 위한 시민문화운동 및 사회운동에 전력하였다고 하겠다. 앞으로 광주YMCA는 창립 80주년 대회에서 채택한 '광주YMCA 비전2020’에 좇아서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고, YMCA 세계연맹이 지향하는 ‘생명과 평화’를 위하여 함께 힘씀으로써 바람직한 글로벌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