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27대 이사장
전남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80년 5월 학생들의 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당시 보안대(현 기무부대)에 끌려가 4개월간 갖은 고문을 당한데 이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뒤 3년간 해직되기도 했다.
이후 1984년 복직해 '5·18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의장 등으로 활동하며 5·18 기념사업 추진과 학살자 처벌에 앞장섰다.
1992-1993년 광주YMCA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98년 정년퇴임 이후 5․18 기념재단 이사장(2001-2002년)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춘화 여사와 4남2녀가 있다.
1992년 2월, 회보 <빛의 아들>을 통해 이광우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광주YMCA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YMCA라는 조직체가 광주라는 지역사회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과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광주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예의 주시하면서, 그늘진 곳과 어두운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촛불과 같이 자기의 몸을 태워서 환히 비춰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예민한 후각으로 썩어가는 곳을 찾아다니며 소금처럼 자기의 몸을 녹여서 부패를 방지하여야 한다. …광주YMCA의 봉사 대상으로서의 광주라는 현실사회는 규모적으로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복잡해졌고, 기능적으로는 다면화되었으며, 생태적으로는 환경에 대하여 민감해졌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사회봉사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YMCA는 어느모로 보든지 여기에 대응하여 폭증하는 봉사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변신시키지 못하였다. …광주YMCA는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활동 프로그램을 다양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예컨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과 여기에 수반되는 도시화의 추세는 익명성을 고도화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악을 유발하고, 이러한 사태에 행정력으로만 대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울러 활동장소의 확대와 재원 확보를 위한 비상수단을 찾는 노력이 강구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