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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옥(金厚玉) 간사 (체육관장)


김후옥은 민족주의적인 청소년 운동의 지도자로서 광주 최초로 소년 척후대를 Y안에 세웠으며, 유도 권투를 비롯한 근대 스포츠를 보급한 선각자이다. 김후옥은 광주 수기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숭일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동맹휴학사건으로 중퇴하였으며 그 뒤에 다시 연희전문학교 수물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는 서울 중앙Y 체육관에 다니면서 유도 3단의 자격을 얻을 정도로 체육에 뛰어났고, 권투 검도 역도 등 만능선수였다.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퍼질 때 이에 가담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1930년 10월 출옥한 그는 광주에 내려와서 숭일학교 강당에 유도와 권투와 역도 도장을 개설하고 청소년의 체육지도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무자격자가 유도를 지도한다는 구실을 붙인 일제의 탄압으로 도장은 폐쇄되고, 김후옥은 다시 상경하여 피나는 고투 끝에 강도관 3단 자격과 사범 면허를 취득한다.


김후옥은 사직공원 방송국 입구에 녹성상회라는 2층 건물을 건축하고 앞에는 거북선표 고무신 점포를 차리고, 뒤편에는 체육관을 두어 유도 권투 역도 등을 지도하였으며, 2층에는 사교장을 두어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교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일제에 의하여 폐쇄되었고, 그는 광주Y의 체육부 간사가 되어 충장로 5가 회관에서 권투, 유도, 역도, 레슬링, 기계체조 등을 지도하게 된다.


당시 광주Y는 광주극장 옆 김용성 소유의 정미소 터에 대지 4백평의 회관을 마련하고 거기에 체육관을 세웠는데, 대지 매수비 4천엔은 협동 총무 어비슨이 부담하였고, 건축비는 호남은행에서 3천 2백엔을 융자받고 모자란 돈 8백엔은 김후옥이 찬조하였다고 한다. 체육관의 운영은 광주 유지인 현준호, 고광표, 최남주, 손종채 등이 지원하여 가능하였는데,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모든 사회체육운동이 광주Y 체육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김후옥은 이 고장의 근대 체육을 일으켜 확대시킨 최초의 지도자였다.


김후옥은 또한 1931년 광주Y 안에 소년척후대(보이스카우트)를 조직하여 지도하였으니, 용진 소년대가 그것이다. 소년척후대는 김후옥에 이어서 문천식 장로가 지도하였는데, 광복 후 이 고장 보이스카웃 운동을 주도한 김학준도 당시 척후대의 단원이었다.


소년척후의 선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나의 명예상 다음의 3조를 전심  전력하여 실행하기로 서약하나이다.
  1. 신과 사회에 대하여 본분을 다하며 척후 준률을 엄수함.
  2. 항상 타인을 원조함.
  3. 덕성을 닦으며 신체와 정신을 건전케 함.”


이와같이 건전한 청소년 운동을 일제는 반일단체요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37년 이를 해산시키고 지도자들을 탄압하였으며, 김후옥 문천식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일제 말엽을 방림동 농촌에서 은거하던 김후옥은 해방이 되자 상경하여 대동청년단 사무총장과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약하였고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광주Y가 금남로1가 현 회관을 건립하고 1971년에 체육관(무진관)을 개설하자 김후옥은 잠시 광주Y 체육관장으로 다시 수고했으나, 1981년에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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