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崔興琮) 3대, 5대. 8대, 10대 회장
Y설립과 성장의 주도자 최흥종 목사는 이 고장 태생의 초대 장로요 목사로서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에 힘썼고, 구라사업과 빈민구제 등 기독교 사회운동에 전력하였으며, 3․1운동에 투신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하였고, 또한 광주YMCA의 창립을 선도함으로써 기독교 청년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요 그리스도 정신의 참 실천자였다.
(1) 오방 선생의 생애
최흥종은 1880년 5월 2일 광주 불로동에서 최학신(崔學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토박이로서 구한말에 순검을 하다가 초대교인 김윤수의 전도로 배유지(유진벨)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1912년에 김윤수와 함께 광주의 모교회인 북문안교회(일명 광주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건달로 알려졌던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었고, 본명이 영종(泳琮)이었던 이름도 흥종으로 바꾸게 된다. 1904년 성탄절에 광주 선교를 시작한 배유지 선교사의 지도하에 성서연구와 신앙훈련을 쌓은 최흥종은 1907년부터 2년간 영광군 염산리교회의 조사(전도사) 일을 보기도 하였지만, 1909년에는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원장인 윌슨 선교사의 어학선생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최흥종은 윌슨 선교사를 도와서 나병퇴치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당시 광주에서 배유지 목사와 함께 사역하던 오원 선교사가 농어촌 전도에 힘쓰다가 과로로 열병에 걸려 제중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목포의 포사이드 선교사가 광주로 급히 오던 중 문둥병 환자를 만나자 그를 자기 말에 싣고 광주에 와서 극진히 치료하였다. 이를 지켜 본 윌슨과 최흥종이 크게 감동을 받아 구라사업을 시작하였고, 평생토록 남들이 꺼려하는 나환자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윌슨과 최흥종은 영국 나환자협회의 도움으로(2천 달라) 1912년에 봉선리에 나환자 수용소, 진료소, 예배처소 등을 마련하였으니 광주 나병원과 봉선리교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최흥종은 1914년에 자기의 땅 1,000평을 병원에 기증하였다(그러나 지역민의 항의로 1926년에 이 시설과 교회는 여천군 율촌면에 이전하여 애양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흥종은 많은 나환자들을 이끌고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우가끼 총독을 면담 간청함으로써, 소록도의 나환자 시설과 병원이 확장되도록 힘을 다하였다.
한편 최흥종 장로는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1917년부터는 북문밖교회(현 중앙교회)의 요람인 기도처의 전도사 일을 보다가 1921년 신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그 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1924년에는 금정교회(현 제일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특히 최흥종 목사는 1920년 7월 29일 광주기독교청년회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1924년에는 회장으로서 연합회에 가입하여 광주Y를 활성화시켰다. 1930년에 재차 회장 일을 맡아 시무하였고, 해방 후에는 Y 재건총회에서 다시 회장에 추대되어 광주Y 복구하는 일에 정성을 바쳤다.
최흥종 목사는 김철과 함께 광주 만세운동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3․1독립만세 운동 때에 앞장서서 가담하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일경의 협박과 고문 속에서도 비밀을 지킴으로써 광주 거사가 예정대로 일어나게 하였다(3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문화정책으로 1년 6월로 감형되어 석방됨). 1922년과 1927년 두 차례나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진하여 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고초를 당하였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복음 선교와 함께 민족운동을 하였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독립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최목사는 사회운동에 힘써서 1920년에 노동공제회 광주회장 일을 맡았고, 1938년에는 좌․우 독립운동가의 연합체인 신간회의 전남지회장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전남위원장과 미군정 고문회 전남회장 일을 하는 등 민족과 나라를 위한 봉사에 끊임없이 힘썼다. 또한 최흥종 목사는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거세수술을 받고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돌린 후, 경양방죽 제방 밑에 움막을 치고 손수레에 기거하며 걸인, 부랑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다섯 가지 욕심을 버린다는 뜻인 오방이란 아호를 이때부터 썼는데 그것은 가정, 사회, 경제, 정치, 기성교회의 제도에 매이지 않음을 나타낸 자유인의 선포였다. 의재의 ‘춘설헌’으로만 알려진 무등산의 거처는 본래 ‘오방정’으로서 석아(石啞) 최원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본래 석아정(石啞亭)이었는데 오방에게 양여하여 오방전(五放亭)이 되었고, 그 뒤에는 의재에게 양여하여 춘설헌(春雪軒)이 되었다. 그는 또한 1944년에 광주의학전문학교(현 전남의대)를 설립할 때 상하이의 교포 손창식을 설득하여 1백만원을 기부케 하는 등 모금운동에 힘써 이 고장에 의전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 후에 광주Y를 재건한 최흥종 목사는 1949년에 의재 허백련 선생과 함께 무등산 증심사 밑에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땅과 겨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농민지도자를 양성하였다. 1955년에는 부랑하던 나환자들을 모아 나주군 남평면에 호혜원이라는 음성 나환자 정착촌을 건설하였고, 1958년에는 무의탁 폐결핵 환자들을 수용하는 송등원을 만들었으며, 1962년 원효사 입구에 결핵환자 수용소인 무등원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에는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62년에는 국민훈장을 수여 받았다. 1964년에 은퇴한 후 1966년 5월 14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5월 18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해방 후 처음인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본래의 묘소는 무등산 입구에 있던 수원지 근처에 있었으나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대전 국립묘지로 옮겨 안장되었다. 최흥종 목사의 후손으로는 2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 최득은은 광주에서 사업을 하다가 별세하였고, 장손 최협 교수는 전남대학에 봉직하고 있으며 광주Y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오방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오방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여 ‘화광동진의 삶’을 발간하였고 소외계층의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으며 2009년에 광주시 남구에 ‘오방로(五放路)’를 명명하고 오방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성황리에 운영하고 있다.
(2) 오방선생의 삶의 가치와 교훈
오방 최흥종 목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첫째로 그는 이 지역의 초대교인으로서 광주의 모교회인 북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북문밖교회의 창설목사요 금정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험난한 시베리아 선교를 두 번이나 맡아하는 등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에 헌신하였다.
둘째로 오방선생의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과 사회봉사의 정신을 높여야 한다. 그는 목사로서 선교적 사명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는 구라사업에 총력을 기울여서 봉선리에 나환자 시설을 개설하여 지성으로 환자들을 돌보았고, 호혜원이나 송등원과 무등원을 만들어서 나환자와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았다. 노동공제회의 책임을 맡았으며 계유구락부를 창립(1933)하여 빈민운동을 전개한 것 등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상을 실천한 것이다. 그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셋째로 오방선생은 독립운동에 깊이 동참하여 옥고를 치른 민족의 지도자였다.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광주의 만세운동은 최목사의 지도를 받은 김철, 김강, 최병준, 황상호, 최영균, 김철주 등 교회청년들이 주도하였는데 또한 이들이 광주Y 설립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가 신간회의 전남지회장을 맡고, 건준위의 전남위원장 일을 한 것도 모두 민족을 사랑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넷째로 오방선생은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매이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장로교 목사요 기독교 사회운동가이면서도 불교인에 가까운 의재 화백과 친교를 나누었고 다석 유영모 선생이나 이현필, 정인세와 같은 신비주의 그리스도인과 교류를 두터이 하였음을 물론, ‘오방’이란 아호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매인 곳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오방선생은 김구 선생이 증정한 휘호처럼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