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崔興琮) 3대, 5대, 8대 회장
오방 최흥종 목사와 정인세 총무에 대해서는 초창기 Y의 인물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 광주 Y의 인물들을 말할 때 이 두사람을 제쳐놓고 백영흠, 김천배, 김윤식, 이영생, 이성학, 오동옥 등을 살피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두 사람의 해방 후 모습을 잠시 되새겨 본다.
최흥종 목사는 일제 말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뜻으로 본인의 사망통지서를 돌린 뒤 세상을 버리고 걸인들과 동거하며 산속에 은거하였지만 해방이 되자 다시 사회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우선 45년 8월 해방직후 건국준비위 전남지부 회장을 맡았고, 한국한센병예방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미군정 고문회장과 호남신문사 회장이 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광주Y재건총회에서 회장에 취임하여 Y재건과 부흥에 힘썼고, 51년 명예회장으로 추대된다.
48년 3월에는 의재 허백련과 함께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하나님과 겨레와 땅을 사랑하는 청년들을 지도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6.25전쟁 이후까지 무등산의 오방정(五放亭)에 기거했는데, 본래 이 처소는 민족주의 언론인이었던 최원순의 석아정(石啞亭)을 양여받은 것으로, 뒤에는 의재의 춘설헌(春雪軒)으로 이어졌다.
51년에는 사회사업협회장이 되었고 55년에는 나주군 산포리에 음성나환자 정착촌 ‘호혜원’을 설립하여 함께 기거하였고 결핵환자요양소인 ‘송등원’을 세웠으며, 62년 원효사 입구에 음성결핵환자를 수용하는 ‘무등원’을 세웠다.
이 고장 최초의 목회자요 민족운동가였던 오방선생은 66년 5월 14일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소외계층과 난민, 한센병환자와 결핵환자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광주사회장(66년 5월 18일)으로 장례를 치루었고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 무등산 입구의 묘소에서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광주Y에서는 오방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이 고장 최초의 목회자오 독립운동가이면서 빈민운동과 구라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사회운동가요 또한 광주YMCA의 설립과 재건에 공헌한 광주Y의 영원한 정신적 초석이다. 광주Y는 오방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위하여 오방장학회를 운영하였고 여러차례 세미나를 개최한 후 오방 최흥종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내용으로 한 “화광동진의 삶”이란 문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 ‘오방아카데미’를 개설하였고, 행정당국의 협조를 얻어 양림동에서 방림동으로 새로 난 큰 길을 ‘오방로’라 명명하였으며, 2010년 광주Y90주년을 맞이하여 ‘오방상’을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