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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배(金天培) 7대, 10대, 17대 총무


울안 김천배 총무는 이 고장 뿐만 아니라 한국 Y 운동을 이끌어간 유수한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Y이론에 밝아서 이상재, 신흥우 등 민족주의적인 지도자에 의하여 계승된 기독교청년회를 토대로 하면서도 국제성과 기독성과 청년성을 조화롭게 꾸며가는 해방 후 우리나라 Y운동의 이론 정립에 힘썼다.


연맹이 발간한 ‘한국YMCA운동사’의 해방 후 역사를 정리하여 집필하였고 ‘기독교청년회의 체육사업’을 저술하였다. 그는 저술가로서 ‘흔들리는 터전(폴 틸리히)’,‘나와 너(마틴 부버)’,‘바보제(하비 콕스)’,‘성서의 드라마’ 등을 번역 출간하였다.


김천배는 1916년 2월 4일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고 1932년에 배제중학을 수학하고 일본에 갔는데, 처음에는 음악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기독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를 만나 감화를 받고 사회운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1935년 잠시 귀국하여 광주Y 지육부를 맡아 일하였다(초창기 총무 최영균은 그의 매형이다). 1938년에 일본 간사이학원(關西學院) 신학부를 수학하고 1940년에 다시 귀국하여 광주Y 간사로 일하던 중 조작된 광주 미국스파이사건에 연루되어 백영흠 등과 3개월간 옥고를 치룬다. 그리고 일제 말엽 교회가 탄압받고 Y운동이 좌절되자  백영흠 목사와 함께 만주로 갔는데 백목사는 그곳에서 1년 있고 김천배는 약 한 달 있다 다시 광주에 온 후 삼종 훈도(소학교 교사)시험을 봐서 교사를 하였다.


한편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이후 광주Y 재건시에는 교육부 간사로 일하면서 시민강좌, 사상강좌를 개최하였는데 매회 300여명의 청중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항상 온화한 모습으로 한결같이 조리있게 강의하고 대화하는 개성미가 돋보였다. '새생명’지를 발간하고 조선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6년부터 47년까지 광주Y 총무를 역임하였고 1949부터 1950년 5월까지 다시 총무로 일하면서 1949년에는 오방과 의재의 삼애학원 설립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6월부터 1953년까지는 피난지 부산에서 Y연합회 학생부 간사를 담당하였다.


또한 김천배는 1953년부터 54년까지 미국 Y 초청으로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수학하였다. 59년 가을  광주Y 총무로 취임을 하였고 1971년 55세가 되어 은퇴를 하였다. 금남로회관 건립과 지도자 양성, Y이념 교육에 주력하였던 김천배 총무는 은퇴 이후 1971년부터 광주Y 이사와 연합회 이사로 Y운동에 기여한다. 1979년부터 광주Y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을 하였고 뒤에 강의내용을 정리하여 제자들이‘복음서 속의 예수’를 간행하였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에 수습위원으로 참여하고 계엄군 행진을 막기 위한 죽음의 행진에 참여하였다. 외신기자와의 인터뷰로 수배를 받아 도피생활을 하던 중 81년 9월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아 고초를 당하였다. 1982년에 다시 성경공부를 인도하였고, 한국Y 연맹과 일본Y 동맹의 간사학교에서 Y이념과 역사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다. 일어와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그가 해방 후 광주Y 학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1988년 3월 10일 5.18 후유증과 지병으로 별세하여 광주YMCA장을 금남로회관에서 거행하였고,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2008년에야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자녀는 장숙희 권사 밑에 아들 김광우 (전남대 교수)와 딸 은경, 이은, 은자, 은정이 있다. 그 뒤 무등산 청옥동의 처소를 광주Y에 기증하여 ‘울안의 집’이라 이름 짓고 연수처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집필 중이던 광주YMCA 역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후학들에게 넘긴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광주Y는 물론 한국YMCA의 이념추구와 정체성 수립에 큰 공헌을 한 YMCA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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