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주(金哲柱) 5대 총무
김철주는 숭일학교 YMCA의 리더로서 1919년 광주 3․1운동에 가담하였는데, 농업학교 학생들과 숭일학교 학생들의 공동참여를 이루어내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징역 10월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으며 숭일학교를 마친 후 서울의 중동중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1920년 8월 광주YMCA가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남 각지를 순회할 때 김정련 선생과 함께 학생으로서 연사활동을 하였다. 최윤상의 글에 의하면 “김철주는 학생Y때부터 학생대표로 중앙대회에 자주 참석하였으며 일본 중국 등 국제회의에도 자주 참석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간 연락책을 맡아 맹활약을 하였으며, 대동단 사건 등으로 4차 투옥된 바 있었으며 축구 야구의 명선수로서 후배양성과 심판으로서도 체육계에 대한 공적이 많았다.”
김철주는 완도중학 등에서 7~8년간 교사 일을 했으며 여천 애양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에 광주YMCA 총무로 부임하였는데(그동안 초대총무로 기록된 것은 金哲의 오기이다) 그때는 일제의 통치가 극악해져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위기의 시대여서 미션학교인 숭일과 수피아는 자진 폐쇄하고 협동총무 어비슨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38년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한국YMCA는 일본YMCA의 산하단체로 편입되었다. 충장로 5가의 회관은 김동일(金東馹)의 목공소로 전락하였고 농업실습학교도 폐쇄되고 보이스카웃도 해산되었으며 모든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1939년 초에 명맥만 남은 광주Y의 회장에 주형옥(朱亨玉) 장로(해방 후에 목사)가 취임하였다. (김철주의 본래 이름은 김창선(金昌鮮)이고 주형옥의 본명은 주태선(朱泰善)으로서 두 사람은 돈독한 의형제였다). 광주YMCA는 1944년 말에 자진폐회를 통고한다. 김철주 총무는 봉급도 없이 무료봉사를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YMCA 문을 닫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김철주는 그 뒤 한지 의사가 되어 여천 백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고, 이남규 지사 시절 여천군수로 기용되었으며 여천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광주 제일교회 장로였고 한동안 호남신문 사장을 하였으나, 다시 의료계에 종사하다가 63세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