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균(崔煐均) 2대, 4대 총무
최영균은 1924년 최흥종 목사가 광주YMCA 회장이 될 때 총무로 부임하여 1931년 김태오 총무 취임시(유상원 회장)까지 시무했고, 1932년 최흥종 회장 재취임과 동시에 다시 총무에 취임하여 1937년 김철주 총무가 취임할 (최영욱 회장)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광주YMCA의 공로자이다. 그는 광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인 최한영, 최남립 등과 교류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회장 역임시에도 북문밖교회(중앙교회)와 금정교회에서 목회하기에 바빴고 특히 1922년과 1929년 두 번에 걸쳐 시베리아 선교(민족운동을 위한)를 다녀왔으며, 노동공제회와 신간회 일이며 계속적인 구라운동과 빈민운동으로 인하여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광주YMCA는 회장 책임제에서 이사회 책임제로 전환되고 최영균 총무는 YMCA사업의 실무를 전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김천배 총무의 둘째 매형이다.
그 당시 광주YMCA는 이사제에 서무, 교육, 운동, 사교, 종교 등의 부서를 두어 광주유치원과 서북여자야학을 운영하고, 각종 계몽 강연회와 음악 무도 가극대회를 개최하는 등 많은 일을 하게 된다. 특히 중앙YMCA의 신흥우 선생이 덴마크식 농촌운동을 도입하여 지방 YMCA에 전하자 광주YMCA는 인근 농촌에서 활발하게 농촌사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어비슨 협동총무가 백운동 저택에 농업실습학교를 세워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숙원이던 첫 회관을 충장로 5가 광주극장 옆에 세울 수 있었고, 1931년에는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으니 광주YMCA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최영균 총무는 1919년 광주 3․1운동에 김철, 김강, 최병준, 정상호 등과 깊이 가담하여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주장하였고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의 주동자들이 모두 1920년에 조직된 YMCA운동에 가담하여 회장과 총무,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아쉽게도 최영균 총무는 교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일제 말엽부터는 YMCA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해방 이후에는 YMCA연맹에서 의뢰한 지방 YMCA실태조사에 참여하여 보고서를 내기도 하였다.